"리테일(소매업) 매장은 새롭게 태어나 번성하고, 생명을 다한 뒤 새로운 모델 탄생의 밑거름 역할을 하는 순환의 역사를 반복해 왔다. 20년 전의 ‘좋은 매장'과 지금의 좋은 매장은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영국의 유명 백화점 데버넘스와 미국의 대표적 고급 백화점 니먼 마커스, 1902년에 문을 연 ‘가성비 좋은 백화점’의 대명사 J.C.페니(Penney) 등이 모두 지난해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그늘만 있던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브릭앤드모르타르 업체인 코스트코는 독특한 회원제 시스템으로 '저(低)마진 고(高)수익' 구조를 유지하면서 2008년부터 지난해까지 11년 연속으로 매출을 끌어올렸다. 봉쇄조치와 재택근무 확산으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홈디포로 대표되는 미국 집수리용품 판매업체들도 톡톡히 재미를 봤다.
팬데믹 이전까지 쇼핑의 중심에 섰던 여성들의 가사 부담이 재택근무하는 남편과 화상수업하는 아이들로 인해 크게 늘어난 것도 리테일 산업에 악재로 작용했다. 바이러스 감염 우려가 없는 ‘안전한 쇼핑'에 대한 관심이 크게 늘면서 빅데이터 기반의 인공지능(AI) 기술과 가상현실(VR)·증강현실(AR) 등 첨단기술 접목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쇼핑 과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파코 언더힐 인바이로셀(Envirosell)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코로나19 사태가 리테일 산업에 미친 영향을 시간과 부(富)의 변화, 여성의 역할 변화, 기술 변화 등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인바이로셀은 미국 뉴욕 맨해튼 브로드웨이에 본사를 둔 컨설팅업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과 일본, 브라질과 멕시코에 지사를 두고 있으며, 맥도날드와 스타벅스, 씨티은행, 삼성전자 등 세계적인 글로벌 기업을 비롯해 46개국의 크고 작은 프로젝트에 관여해 왔다.
인바이로셀은 분석 의뢰를 받은 매장에 '추적자(tracker)'라고 부르는 조사원들을 배치한다. 이들은 특정 쇼핑객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매장을 어느 경로로 돌아다니고 어떤 제품에 관심을 보이는지, 집어든 제품의 정보(디자인·가격·성분·유통기한 등) 가운데 무엇을 눈여겨보는지, 얼마나 오래 매장에 머무는지 등을 세밀하게 기록한다. 장을 나서는 쇼핑객을 붙잡고 행동의 의미를 묻기도 한다. "쇼핑의 과학은 '관찰'에서 출발한다"는 언더힐의 신념이 반영된 것이다.
언더힐이 1999년 펴낸 ‘쇼핑의 과학(Why We Buy:The Science of Shopping)’’은 지금까지 28개 언어로 번역된 리테일 분야의 필독서다. 책을 한줄로 요약하면 ‘소비자를 매장에 오래 붙잡아 놓고 물건 하나라도 더 팔기 위한 고찰’이다. 22년의 시간이 흘러도 널리 읽히는 건 ‘변하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미국 코네티컷주 매디슨의 자택에 머물고 있는 언더힐을 구글 미트로 화상 인터뷰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리테일 산업에 미친 영향을 간단히 설명한다면.
"팬데믹으로 전에 없던 현상이 나타났다기 보다는 이전에 있던 움직임이 가속화됐다고 보는 것이 맞다. 변화의 많은 부분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난 것과 관련이 있다. 전 세계 어디나 마찬가지다.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삶의 우선순위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고, 가족이 함께하는 식사자리나 가족을 위한 요리의 기회도 늘었을 것이다. 이같은 변화는 결국 소비 패턴의 변화로 이어졌다. 팬데믹 기간 중 미국에서 제빵 요리책과 와플믹스 등의 판매가 급증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마케터 입장에서 특별히 관심을 갖고 지켜봐야 할 변화가 있을까.
"원격 커뮤니케이션의 확산으로 연령대에 따른 '디지털 리터러시(디지털 정보 이해·표현 능력)' 격차가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에 관해서 만큼은 50대에게 20대 만큼의 적응능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여성의 위상 변화도 중요한 변화다. 팬데믹 이전까지 소비에서 여성의 영향력은 압도적이었다. 화장품이나 음식, 의류는 물론 정보기술(IT) 기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그랬다. IT 기기의 경우 남성들은 자신을 위해 구입하지만, 여성들은 본인은 물론 아이들과 부모를 위해서도 구입하기 때문이다."
그건 팬데믹 이후에도 마찬가지 아닌가.
"팬데믹 이후 집에서 재택근무와 화상수업을 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여성들이 집에서 남편과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부담까지 떠안게 됐다는 것이 문제다. 미국의 상황도 심각하다. 많은 학교들이 열었다 닫았다를 반복하고 있고, 15세 이하 아이들은 특히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또 어떤 부분에 주목해야 할까.
"시간 사용에도 변화가 생겼다. 우리가 지하철에서 이동 중에도 모바일 쇼핑을 즐길 수 있는 건 동시에 여러 일을 하는 ‘멀티태스킹’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팬데믹 기간 동안 우리의 멀티태스킹 능력에도 일정 부분 제약이 불가피해졌다. 재택근무하는 남편과 화상수업을 듣는 자녀를 돌보며 가사일까지 해야 하는 전업주부의 경우나 집에서 화상회의 중 택배기사가 초인종을 누르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언급한 변화들이 어디서나 동일하게 나타나진 않을 것 같다.
"팬데믹 여파로 소득 수준 격차가 더 커졌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애플과 삼성, 마이크로소프트(MS) 등 빅테크 기업의 주주들은 펜데믹 기간 동안 주가가 오르면서 더 부유해졌을 것이다. 우리 생활이 그만큼 기술과 밀접하게 엮여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사회 전반에 걸친 빈곤과 노인문제 등은 이전보다 훨씬 심각해졌다. 국가별, 지역별 차이도 크다. 예를 들어 인구밀도가 높은 서울에서 통하는 비즈니스 모델이 거주지가 넓게 분산된 브라질의 상파울루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 있다."
기술 변화의 영향은 어떤가.
"옷감을 위생적으로 관리하는 기술이나 매장의 CCTV와 고객 스마트폰을 연동해 적절한 거리를 두지 않을 경우 알림을 보내는 기술, VR 기술을 접목한 가상(virtual) 드레싱룸 등 다양한 안전한 쇼핑을 위한 다양한 기술 접목이 시도되고 있다. 나는 전 세계 여러 기술기업의 이사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리테일 산업에서 첨단기술의 접목 방향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20세기의 기술이 대형화를 지향한 반면 21세기의 기술은 반대로 더 작아지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무슨 뜻인가.
"집에서 김치를 만들어 먹는 것과 서울에서 수입한 것을 먹는 것 중 어느 편이 더 건강에 좋을까. 당연히 집에서 만든 쪽이 건강에 좋을 것이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훨씬 많다. 건강과 환경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텃밭에서 채소를 직접 재배하거나 태양열 발전기를 설치하는 사람이 늘어난 것 등이 모두 ‘소형화' 추세의 예다."
뉴욕의 명문 리버럴아츠스쿨(학부중심 대학)인 배서칼리지를 졸업한 언더힐은 부친이 1970년대에 주한 미국 부대사를 지낸 덕분에 서울에서 1년을 살았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가 끝나면 딸과 함께 처음으로 집에서 김치를 만들어 볼 계획이라고 귀띔했다.
기술 변화로 전 세계적인 부의 지형도 또한 바뀌고 있는 것 같다.
"그렇다. 상하이의 쇼핑몰에서 각각 30대와 60대의 중국인 여성이 나란히 걷고 있다면 확률적으로 30대 여성의 자산이 더 많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미국이나 서유럽의 경우에는 그 반대일 확률이 훨씬 크다. 한국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는 젊은이들의 손에 부가 쥐어져 있다. 기술의 진보를 적극적으로 끌어안은 덕분이다. 기술의 미래가 궁금하다면 이제는 뉴욕이 아닌 서울에 가야 한다."
"실리콘밸리를 이끄는 힘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에서 나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 세계적인 BTS(방탄소년단) 열풍과 한류 드라마의 인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한국은 대중문화를 새롭게 창조했다. 이제는 한국도 다른 나라의 문화를 폭넓게 수용할 때가 됐다."
코로나 사태로 오프라인 쇼핑의 위기를 가속화했다. 앞으로는 어떨까.
"우리가 사는 디지털 세상에는 아날로그의 자리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리테일 산업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더 나은 아날로그’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부탁한다.
"난 브라질의 한 쇼핑몰 기업 이사회 멤버다. 요즘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는 공항에 쇼핑몰을 입점시키는 것이다.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는지 생각해 보라. 오프라인 쇼핑이 비집고 들어갈 틈은 충분히 있다. 오프라인 매장의 역할은 그저 물건을 쌓아두고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느끼고, 경험하게 만드는 것이다. 간호사나 건설현장의 관리자, 의사와 경찰 처럼 사무실에서 온라인 쇼핑으로 물건을 전해받기 어려운 이들이 많이 있다는 것도 ‘더 나은 아날로그'를 찾아야 하는 이유다. 사실 우리 시대의 디지털 기술은 아날로그에 상당부분 의존하고 있다. 스마트폰에 문제가 생기면 통신사 매장에 가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나."
리테일 업계의 경영방식도 달라져야 할 부분이 있을까.
"리테일 기업의 사무실이나 식음료 매장에서 관리자들의 자리는 출입구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출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자리를 옮겨야 한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스마트기기의 화면을 보며 생각에 몰두하기 보다는 밖으로 나가 매장에서 시간을 더 보내야 한다. 내가 제프 베이조스(아마존 최고경영자)라면 매달 일주일은 물류창고에서 시간을 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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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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