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시작된 대출은 올해 2월 졸업 전까지 학기마다 150만 원씩, 900만 원이 쌓였다. 지난해엔 등록금대출 200만 원까지 받아야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위기 시대를 살아가는 이 씨가 들려준 ‘머니로그’(머니와 기록을 뜻하는 로그의 합친 말)는 빚으로 시작한다.
이 씨는 “취업이 잘된다”는 어른들의 추천으로 4년제 공학계열 특성화대학에 입학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일찌감치 코딩을 공부한 동기들은 정보기술(IT) 기업에 입사해 개발자로 몸값을 높이지만 나머지는 여전히 취업준비생. 이 씨도 이제야 한 청년아카데미에서 코딩 수업을 받고 있다. “언제 취직해 학자금대출 1100만 원을 갚을지 막막합니다. 대출 금리도 오를 일만 남았네요.”
코로나19 위기 이후 청년층의 빚이 빠르게 늘면서 올해 처음 2030세대 소득에서 부채가 차지하는 비율(LTI)이 다른 연령층을 추월했다.40대이상 연령층보다 높아져
“기회 사다리 끊긴 환멸 세대”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 때도 청년들은 바늘구멍 같은 취업문을 뚫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청년들에겐 고금리 적금을 붓고 결혼을 하고 내 집을 마련하는 일종의 ‘인생 공식’이 통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의 20, 30대는 이런 통과의례가 사치가 된 지 오래다. 코로나19 위기 1년을 버틴 청년도, 외환·금융위기 직후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던 과거의 청년도 “지금 젊은층의 절망감이 더 크다”고 입을 모았다. 10년 주기로 닥친 경제위기에 20, 30대를 보냈거나 보내고 있는 8명을 인터뷰해 이들의 금융·경제 활동을 기록한 ‘머니로그’(머니와 기록을 뜻하는 로그의 합친 말)를 들여다봤다.
대학 졸업을 앞둔 지난해 2월 곽모 씨(26)는 ‘최종 합격’이 적힌 메일을 처음 받았다. 1년간 30번 넘게 탈락한 끝에 얻은 결과였다. 그렇게 그는 수도권 외곽에 있는 자동차부품 회사 인사팀의 신입사원이 됐다. 서울 대학 앞 자취방을 빼고 경기 용인시의 월세 50만 원대 오피스텔도 얻었다.
올해 8월 말 그는 두 번째 ‘첫 출근’을 했다. 서울 도심에 본사를 둔 5대 그룹 계열사였다. 입사 동기 6명 중 5명이 곽 씨처럼 이직한 ‘중고 신입’. 그룹 계열사 동기 100명 중 절반도 마찬가지였다. 요즘 기업들이 실무 경력이 있는 지원자를 우선 채용하기 때문이다.
새 직장 근처로 이사하고 싶었지만 대기업 월급으로도 괜찮은 매물을 찾을 수 없었다. 용인 오피스텔 계약을 2년 더 연장하고 지하철, 버스를 갈아타는 출퇴근에 왕복 3시간을 쏟고 있다. 곽 씨는 매달 월세와 오피스텔 보증금 대출 이자 60만 원을 빼고 남는 월급을 몽땅 쇼핑하는 데 쓴다. 저축이나 투자 계획은 없다. 그는 “굳이 돈을 모아야 한다면 차 사려고? 차는 돈 모으면 살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으니까”라고 했다.
2008년 여름 이모 씨(40)는 곽 씨보다 한 살 많은 27세에 외국계 은행에 입사했다. 금융위기 충격으로 국내외 금융사들이 주니어 직원마저 내보내던 때였다. 인턴 9개월, 계약직 1년을 버틴 끝에 때마침 생긴 결원이 운 좋게 그의 몫이 됐다.
이 씨는 월급 절반을 은행 예·적금에 넣었다. 외환위기 전의 두 자릿수 이자는 사라졌지만 연 5%대 이자가 나왔다. 국내에서도 문 닫는 은행이 나올 거라는 말이 돌았지만 1년 정도 지나자 금융업엔 다시 호황이 찾아왔다. 두 차례 회사를 옮긴 그는 현재 증권사에서 일하고 있다. 금융자산은 10억 원이 넘는다. 이 씨는 “위기에도 기회가 온다고 믿었고 실제 기회가 찾아왔다”고 했다.
입사하자마자 혼자 살 집을 구하러 나섰다. 서울 마포구 원룸을 처음 보러간 날 ‘전셋값 3억 원’이라는 얘기에 좌절했다. 3개월간 원룸, 빌라 수십 곳을 둘러보다가 발을 돌렸다.
“그때 깨달았죠. 아무리 기 쓰고 일해도 내 집 하나 마련할 수 없다는 걸.” 보증금 4500만 원, 월세 46만 원짜리 청년임대주택은 나이 외엔 입주조건이 없었다. 대학 시절 모아놓은 돈과 석 달 치 월급, 부모님 지원금을 보태 보증금을 냈다.
청년임대주택에 입주하는 날 내 집 마련의 꿈을 버린 김 씨는 최근 결혼도 포기했다. ‘집 없는 결혼’을 해서 아등바등 살 바엔 스스로를 위해 시간과 돈을 쓰기로 했다. 김 씨는 “대기업에 취업해도 집 살 엄두가 안 나는데 결혼까지 굳이 해야 하느냐”며 “30년 뒤에도 지금처럼 혼자 월세를 살 것”이라고 했다.
김 씨는 회사 선배들과 수다를 떨다가도 부동산, 결혼 얘기만 나오면 입을 다문다. “부장님이 ‘돈 모아서 부동산에 올인해라’ ‘결혼해야 돈 모은다’고 하는데 황당해요. 집이 있어야 돈이 모이고, 돈 있어야 결혼하는 시대 아닌가요?”
2008년 금융회사에 입사한 한모 씨(40)는 1년 뒤 후배 직원들의 월급이 20% 삭감되는 걸 지켜봤다. 금융위기 직후 정부가 일자리 나누기를 위해 공기업과 금융권 신입사원 임금을 일괄 깎던 시기였다.
그나마 ‘집부터 사라’는 부장님의 조언 덕에 한 씨는 서울 서초구에 집 한 채를 장만했다. 결혼 후 얻은 전셋집 계약이 끝나자 대출 2억3000만 원을 끼고 4억5000만 원에 아파트를 샀다. 매달 원금과 이자가 200만 원 넘게 나갔지만 10년간 허리띠를 졸라매며 갚았고 아파트 값은 뛰었다. 한 씨는 “우리 세대는 집이든, 대출이든 먼저 깃발을 꽂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었다. 지금 입사한 후배들은 게임에 참여도 못 하는 처지”라고 했다.
임형주 씨(56)도 30대 초반의 두 딸을 보면 안쓰럽다. 1998년 외환위기로 남편 사업이 부도나 보험 영업을 시작했던 임 씨보다 자식 세대의 처지가 나아보이지 않는다. 임 씨는 “악착같이 뛰면 ‘IMF 세대’에겐 기회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것도 없다”고 했다.
수익률이 좋다는 ‘잡(雜)코인’을 찾아 학자금대출로 받은 400만 원을 넣었다. 반짝 오르던 코인이 추락하는 건 한순간. 이 씨는 손해를 보고 코인에서 손을 털었다.
코스닥 종목과 테마주를 오가는 ‘단타 개미’가 됐지만 남은 건 극심한 피로와 손실뿐. 다시 밤새 책과 유튜브 채널을 보며 공부했다. “분할 매수, 분할 매도, 자산 배분.” 스스로 투자 원칙을 세우니 수익률이 오르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하지만 지난해 3월 증시가 폭락하자 순식간에 1000만 원이 사라졌다. ‘멘붕’(멘털 붕괴)에서 벗어나 해외 주식, 달러, 채권 등으로 오히려 투자 저변을 넓혔다. 최근 인플레이션, 긴축 우려 등으로 국내외 증시가 출렁이고 있지만 올해 수익률은 15%를 웃돈다.
자동차 영업사원인 현모 씨(50)도 2년 전 다시 주식 투자를 시작했다. 마이너스통장으로 대출받은 2000만 원을 주식에 넣었다가 날린 지 11년 만이다.
1998년 처음 자동차 영업에 뛰어들었을 때보다 지금 더 나빠진 경기를 보며 투자에 길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공급망 위기까지 겹쳐 완성차 출고가 미뤄지면서 현 씨의 수입은 거의 끊겼다. 현 씨는 “일찌감치 주식 투자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 아들에겐 이런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고 했다.
박희창 기자 ramblas@donga.com
신지환 기자 jhshin93@donga.com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
이상환 기자 payback@donga.com
Copyright by dongA.com All rights reserved.
https://ift.tt/3rjIRWd
쇼핑
Bagikan Berita Ini
0 Response to "“학자금 대출받아 코인 투자” “집 엄두 못내 저축 대신 쇼핑” - 동아일보"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