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드 목사(가운데) 지난 4월 29일 LA 퍼스트흑인감리교회에서 열린 제29주년 4·29폭동 기념, 한·흑 커뮤니티 포럼에 참가한 한인참석자들과 손을 모으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김상진 기자 |
1991년 6월 4일. 사우스LA 지역 한인 상점 정스마켓(7900 S. Western Ave.)에서 주인 박태삼씨(당시 47세)는 흑인 강도 용의자 리 아서 미첼(당시 42세)에게 총을 쏘았다. 당시 경찰과 검찰 모두 박씨의 정당방위로 결론내렸다. 두순자씨 사건이 터지고 약 50일 뒤 나온 유사 사건이었다. (한인이 가해자로 몰리던 91년 한 해 동안 흑인 강도에 의해 살해된 한인업주는 7명에 달했다.)
당시 보이드 목사는 정스마켓 건너편에 있던 베델 AME 교회 담임목사였다. 그는 시위대와 함께 정스마켓 앞에서 113일 연속 시위를 했다. “미첼은 주머니에 술을 살 돈이 있었다. 주머니 안에 무기도 없었다. 박씨는 미첼이 술을 훔치려고 했고, 먼저 공격을 당해 총 쐈다고 했지만 분명한 것은 미첼에게 무기가 없었고, 그 자리에서 살해됐다는 것이다. 반면 박씨는 체포되지도, 기소되지도 않았다. 내가 맡았던 교회 바로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두순자 사건으로 흑인사회가 충격에 빠져있던 와중에 한인 상점에서 나온 또 하나의 비극이었다.”
흑인사회의 대대적인 불매시위로 정스마켓은 영업 불가능 상황에 처했다. 하루 매상이 900달러에서 7달러로 뚝 떨어졌다. 박씨는 결국 가게를 내놓았다. 마켓 건물은 보이드 목사가 이끈 베델 AME 교회가 매입했다. 그는 한흑갈등 완화를 위해 한인식품상협회와도 만났다고 했다.
“흑인사회지만 흑인이 비즈니스 소유를 하기 힘든 환경이라는 것을 한인사회에 알리고 싶었다. 은행에서는 흑인들에게 비즈니스 융자도 주지 않았다.”그는 흑인사회가 한인사회로부터 경제적 빈곤을 이겨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플로이드 1주기를 언급했다.
“1992년 로드니 킹 평결 때 흑인사회가 엄청난 분노를 느꼈다면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살해사건 평결을 통해 비로소 정의를 느꼈다. 흑인 역사는 한인 이민역사보다 길다. 우리가 느낀 고통의 시간도 더 길다. 로드니 킹 사건은 흑인사회가 오랜 기간 느껴온, 시스템적인 차별 그 비참함의 임계점이었다. 한흑 관계는 그 전까지 제대로 정리되지 않다가 킹 사건으로 인해 최악의 분노로 치달았다. 폭동으로 인한 경제적 손실 중 절반은 한인사회가 떠안았다.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후 한인사회는 더 강한 모습으로 일어섰다. 한인사회의 힘과 영향력은 눈부시게 성장했다. 그에 반해 흑인사회는 여전히 경제와 사회적 도전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한흑간 충돌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서로 간 커뮤니티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
보이드 목사는 데릭 쇼빈 전 경관의 플로이드 살해 유죄 평결은 흑인시위대 ‘블랙 라이브 매터스(BLM)’가 이끌어낸 수확이라고 평했다. 그는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도 해내지 못한 걸 BLM이 이뤄냈다”고 했다.
한인사회 발전에 기립박수를 보낸다고 했다. 한인사회를 보며 흑인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가 산적해 있다는 것을 더욱 실감했다고 토로했다. 한흑관계 발전을 위해 상호간 ‘이해’와 ‘공감’이 필요하다고 했다. “서로에 대해 배우는 것을 서로가 도와주자. 한인과 흑인 커뮤니티 모두 상처가 컸다. 흑인 커뮤니티가 역사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해하고 공감해 줬으면 한다. 커뮤니티 리더와 멤버들이 정기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장도 마련하자”고 주문했다. 그는 한인과 흑인 모두 인종차별을 겪었지만 그 농도에 있어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했다.
“우리는 경제와 사회적 탄압을 받은 민족이다. 그동안 한인사회가 번창할 수 있었던 데는 흑인들 만큼 탄압을 받지 않은 이유도 있다. 기득권 백인들은 과거 흑인사회가 일어서려는 것을 제도적으로 수차례 막았다. 우리의 열정을 짓밟고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근대 들어 삼진아웃제가 그 대표적 사례다. 악질적인 일부 복지 시스템도 흑인 가정의 붕괴를 초래했다. 싱글맘의 경우, 결혼하면 보조금 지원을 끊는 식으로 말이다.”
보이드 목사는 “제시 잭슨 목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우리(흑인)를 살려줄 수 있는 것은 우리 뿐이라고. 우리가 쟁취해야 한다. 서로를 신뢰하면 우리도 한인사회가 일궈낸 일들을 이뤄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민주당 성향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정신적 스승이자 그의 교회 담임 목사였던 제러마이어 라이트 이름이 그의 입에서 자주 나온다. 시인이자 예언가로 칭송했다.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지만 그가 펼친 흑인정책 일부에 대해서는 도움이 됐다고 인정했다.
“(진보논객) 밴 존스 등과 함께 손잡고 교도소 개혁법(First Step Act)을 초당적으로 통과시킨 것은 점수를 줄만하다. 지나치게 과한 징역형을 받았다고 여기는 수감자들의 형량을 재검토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다. 덕분에 약 1000명의 흑인 수감자가 평균 70개월형 감형을 받았다.” 트럼프 임기 동안 흑인 실업률이 역대 최저를 기록한 공로도 높이 샀다. 하지만 이내 쓴소리가 이어졌다. “그런데 트럼프가 이런 치적들을 너무 자랑(tout)하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흑인 공화당 연방상원의원 팀 스캇(사우스 캐롤라이나)은 최근 조 바이든 의회연설에 대해 “오늘날 미국은 시스템적인 인종차별주의 국가가 아니다”라고 정면반박했다. 스캇 의원 발언에 대해 “미국이 인종차별주의 국가라면 흑인 인권은 지금 아예 없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 시스템적 차별로 인해 후세에 지대한 악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은 낙태와 동성결혼을 비롯해 성전환 남성의 여성 스포츠 참여 등의 정책을 펼치고 있다. 목회자로서 그가 왜 줄곧 민주당만 지지해 왔는지 또 최근 많은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진보적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의 의견이 궁금했다.
그의 대답은 “용서”로 귀결됐다. “동성애 라이프스타일은 흑인사회에서 오랫동안 지속됐던 이슈였다. 그들은 동성애 사실을 숨기며 살았지 그들 자체가 없었던 것이 아니다. 우리 목회자들은 일제히 동성애가 죄라고 비판했다. 흑인사회에서 하나님은 아담과 이브를 만들었지, 아담과 스티브를 만든 게 아니라는 말도 있다. 하지만 세상은 변했다. 아이들의 성 기호도 정상과 많이 달라진 시대다. 또 10대 소녀 임신문제는 흑인사회의 커다란 문제다. 그들의 무책임함과 실수, 또 강간 등으로 인해 야기된 문제다. 이들이 출산하면 누가 그 아이들을 키울 것인가. 나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싶다. 그들을 비판하고 싶지 않다. 그들이 백인이든, 흑인이든, 진보든, 보수든 말이다. 우리는 용서하는 사람들이다.”
인터뷰 말미 그는 데스크에 있는 꽃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저 화분을 보라. 다양한 꽃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꽃도 여러 종류가 같이 있을 때 더욱 아름답다. 서로 다른 인종이 화합하면 얼마나 더 아름답겠는가.”
보이드 목사는?
보이드 목사는 베트남전 참전 뒤 1970년 전역해 1971년부터 목회 활동을 했다. 웨스턴 워싱턴대를 거쳐 두부케 신학교를 졸업했고 북가주 오클랜드의 브루킨스 AME 교회, LA 베델 AME 교회, 샌프란시스코 베델 AME 교회 등을 거쳤다.
1980년대와 90년대에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든 보이드 목사는 건강, 약물 남용, 노숙자 지원, 저소득 주택, 고용 등과 관련된 태스크포스 40개를 창설했다. 이들 태스크포스의 회원은 1만9000여 명에 이른다.
보이드 목사가 2012년부터 담임목사로 있는 ‘LA 퍼스트흑인감리교회(First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 of Los Angeles: 이하 FAME)’는 흑인 커뮤니티 대형 교회로 1872년에 창립됐다. LA에서 흑인이 세운 가장 오래된 교회다. 현재 전국에서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큰 교회 중 하나로 꼽힌다. 버락 오바마와 빌 클린턴,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 카말라 해리스 부통령 등 정계 거물들이 꼭 한 번은 예배를 참석하는 교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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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공격에 ‘흑인 월가’ 잿더미
흑인사회 울린 2대 사건
보이드 목사는 시스템적인 흑인 차별의 대표적인 사례로 2가지 사건을 들었다. 하나는 땅을 줬다 다시 뺐음으로써 흑인 자립의 근거를 허문 사례이고 하나는 흑인이 힘들여 일군 상권을 파괴한 사건이었다.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40 acres and a mule)’. 이 문구를 모르는 흑인은 없다. 보이드 목사는 “한인사회가 흑인사회 아픔을 이해하려면 꼭 이해해야 하는 문구”라고 했다. ‘가구당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는 남북전쟁 이후 해방된 400만 흑인에게 땅과 노새를 나눠주기로 한 약속이다. 오랜 세월 노예노동에 대한 물리적 보상차원에서 1865년 1월 윌리엄 셔먼 장군이 내린 특별 야전명령이다. 당시 휘하에 1만여 흑인병사가 있었던 셔먼 장군은 흑인들에게 자유 뿐 아니라 토지가 절실하다는 사실을 알고 이같은 명령을 내렸다. 자유를 얻어도 자립할 경제력이 없다면 자유도 무의미하다고 판단했다.
“1864~1865년에 잠깐 실행이 됐다. 조지아주 스키더웨이 아일랜드가 흑인들에게 주어졌고, 첫 흑인 주지사도 탄생했다. 흑인들에게 플로리다주 웨스트 팜비치 땅도 주어졌다. 하지만 백인들이 나중에 해변가가 있는 팜비치 땅이 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이미 흑인들에게 배분됐던 땅을 다시 압류했다.”
자유인이 됐지만 경작할 토지 한 뼘 없었던 흑인들은 결국 다시 백인들의 소작인이 됐다. 노예는 지주가 최저생활이라도 제공했지만 소작인은 비빌 언덕도 없이 죽어라 일해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웠다. 그때 이후 ‘40에이커와 노새 한 마리’는 흑인들이 마땅히 받아야 했던 보상의 상징이자 백인들에 대한 원한과 배신감을 상징하는 문구가 됐다. 전쟁 말기 잠깐 시행된 이 명령은 링컨 대통령 암살 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남부 출신 부통령 앤드루 존슨에 의해 바로 폐지됐다.
▶털사 인종 학살
‘털사 인종 학살((Tulsa Race Massacre)’은 흑인 월가(Black Wall Street) 사건으로도 불린다. 20세기 초 오클라호마주 털사 그린우드 디스트릭트에 흑인 상업지구가 들어섰다. 1905년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이 경제구역은 전국에서 가장 부유한 흑인들이 모인 상권이었다. 노예해방과 함께 흑인 노예들이 모여 경제적 번영을 이뤘다.
1921년 5월 31일 메모리얼데이에 어처구니 없는 사건 하나가 흑인 월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한 빌딩의 엘리베이터 걸로 일하던 17세 백인 소녀의 팔을 19세 흑인 구두닦이 소년이 잡은 사건이었다. 낡은 엘리베이터가 흔들리는 바람에 균형을 잃었던 흑인 소년이 자기도 모르게 옆에 서 있던 백인 소녀 팔을 잡은 것이다. 소녀는 놀라서 소리를 지르며 뛰쳐나갔다. 이것이 폭행으로 와전되면서 털사 백인들은 분노했다. 겁에 질린 흑인 소년은 엄마 집으로 피신했다.
무장한 백인들은 흑인 월가를 습격했다. 이틀 동안 살인과 방화, 약탈이 자행됐다. 2001년 오클라호마주 조사위원회 추정에 따르면 최대 300명의 흑인이 사망했다. 35개 블록에서 1256채가 불에 탔고 흑인 1만여 명이 집을 잃었다. 막 꽃을 피우던 흑인 월가는 잿더미가 됐다. 2019년 HBO 드라마 ‘왓치맨’이 이 사건을 재조명했다.
100년 전인 1921년 5월 털사 인종 학살로 파괴된 흑인 부유층 상권 그린우드. [A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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