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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필요한 쇼핑에 대한 천사의 고지 - 트래비

너는 11시간 후 유럽에 도착한다. 그리고 네 지갑은 지옥에 간다. 

바쁜 도시, 쇼핑 천국에서 내려온 고지, 너의 지갑은 지옥으로 간다
바쁜 도시, 쇼핑 천국에서 내려온 고지, 너의 지갑은 지옥으로 간다

●그 술의 맛을 모르는 이유


여행자는 무엇인가를 사게 되기 마련이다. 쇼핑은 여행의 재미를 준다. 대부분 국내에서 볼 수 없는 꽤 근사한 물건을 구매하고 그것을 사회관계망(SNS)에 올려 자랑도 한다. 나는 불행히도 대부분에 속하지 못했다. 절대로 필요 없는 물건을 싸게 구매하거나 꼭 필요한 물건을 비싸게 사고 만다. 충동구매를 피하기 위해서도 환전을 많이 하지 말았어야 했다. 테러도 감염병도 인종차별도 무섭지만, 개인적으로 여행에서 가장 공포스러운 장애는 물가라고 생각한다. 특히 환율이 좋지 않을 때는 더욱 그렇다. 

진지하게 쇼핑 중이다. 무서워하지 마라
진지하게 쇼핑 중이다. 무서워하지 마라

태국 바트(bhat)가 20원 정도 할 때는 정말 원 없이 먹고 썼다. 오로지 짐을 들고 다니기 싫어서 방콕에다 방을 잡아 놓고 파타야를 2박 다녀온 적도 있다. 그것도 택시를 타고 갔다 왔다. 탄산음료가 생과일주스보다 싼 나라니 어련할까. 미지근한 오이를 샀다가 한 입만 먹고 버리기도 했으며, 줄을 섰길래 따라 산 누텔라 투성이 로티(당뇨병 환자를 양산하기 위해 고안된)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그냥 버린 적도 있다. 그때는 하하하 웃었지만, 지금은 그리하지 못한다. 1바트가 무려 40원에 육박한다.


남인도 께랄라주의 역사적인 도시 ‘코친’에서의 일이다. 지저분한 시장의 불결한 가게에서 파는 바나나 튀김이 궁금했던 것이 내 불찰이었다. 뭐라 뭐라 하길래 손에 잡히는 대로 지폐 한 장을 줬더니(아마도 500루피였던 것 같다) 자루를 싹싹 긁어 바나나 튀김 한 말 정도 내줬다. 물론 두어 개 집어먹고 버렸다. 2006년의 우즈베키스탄 물가는 워낙 저렴해 불과 50숨(cym, 한화로 약 4만5,000원)에 무겁고 훌륭한 아코디언을 살 수 있었다.

나는 10kg은 족히 넘는 그 아코디언을 들고 3개국을 다니며 열흘간의 나머지 일정을 소화했다. 물론 배워 보려고 산 것이지만 당시 아코디언을 가르쳐주는 곳은 낙원상가의 길거리 악사 노인밖에 없었다. 그 노인은 내게 “악보는 볼 줄 몰라도 된다. 나도 못 본다”라며 “대신 하루에 2시간씩 탑골공원 뒤편으로 나오라”라고 했다. 그날 이후 내겐 근사한 발받침이 생겼다.


일본 니가타 양조장에서 산 1리터짜리 ‘고시노감바이(越乃寒梅) 시로 라베루(白ラベル) 준마이 다이긴조’는 사흘간 애지중지 품고 다녔다. 그로부터 정확히 사흘이 지난 후 인천공항 주차장에서 떨어뜨려 깨기 전까지는 정말 훌륭한 벗처럼 내게 희망을 줬다. 난 아직도 그 맛을 모른다.

수많은 전통의상을 입어 보고 또 사기도 했다. 의상도착자로 오해받는 일만큼은 피했어야 한다
수많은 전통의상을 입어 보고 또 사기도 했다. 의상도착자로 오해받는 일만큼은 피했어야 한다

●향수가 필요 없는 남자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산 모자는 정말이지 좋은 쇼핑이라고 생각했다. 값은 좀 비싼 편이었지만 꽤 흡족했다. 나지막한 높이에 매끄러운 재질, 특히 한국에는 볼 수 없는 디자인이었던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귀국 비행기 안에서 글귀 하나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제조 판매원 서울 강남구 역삼동. 모자를 껴안고 잠을 청하다 우연히 본 모자 속 라벨 글씨였다. 대한민국에서 만들어 힘겹게 지구 반대편으로 보낸 모자를 내가 다시 사 온 것이다. 항공편으로. 

직경 1m의 모자는 북중미로부터 미국 텍시스와 도쿄를 거쳐 24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했지만, 그의 일행은 이미 황학동 벼룩시장에 와 있었다
직경 1m의 모자는 북중미로부터 미국 텍시스와 도쿄를 거쳐 24시간 만에 서울에 도착했지만, 그의 일행은 이미 황학동 벼룩시장에 와 있었다

해외에서 모자를 산다는 건 아무래도 내겐 잘못된 일인 것 같다. 2008년에 나는 멕시코 유카탄에서 멋진 솜브레로(sombrero, 챙 넓은 멕시코 전통 모자)를 샀는데 이것이야말로 한국에는 절대 없는 희귀 아이템이라 여겼다. 40달러짜리 은박에 파란색과, 50달러짜리 금박에 검은색 중 고민하다가 은박을 골랐다. 주변이 요란한 은박으로 장식된 솜브레로는 접히지 않아 굉장한 짐이 됐지만 행복했다.

수하물로 부칠 수도 없었다. 멕시코를 떠나 미국 포트워스에서 환승하고 인천공항을 거쳐 공항버스를 타는 내내 나는 직경 1m짜리 모자를 쓰고 있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의 “올라(hola)” 인사와 입국심사관의 수상한 눈초리를 받았지만 그래도 귀한 모자가 생겨서 좋았다. 나는 그 이후 황학동에 절대로 가지 말았어야 했다. 최근 멕시코와 우리는 어떤 밀접한 교류가 있었지? 솜브레로가, 그것도 금박에 파란색이 왜 한국의 길거리 좌판에 있을까? 1만원이라니. 마야 문명만큼이나 미스터리 한 일이 동묘 부근에 벌어지고 있었다.

대체 시거향이 나는 쿠바산 향수란 무엇인가. 독거노인 재떨이 냄새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대체 시거향이 나는 쿠바산 향수란 무엇인가. 독거노인 재떨이 냄새와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세계 각국의 전통 의상도 많이 구매했다. 몽골과 우즈베키스탄, 브라질, 인도, 이란 민족이나 베두인족들이 즐겨 입는 옷인데 한국에 상륙하고 나면 이상하게도 볼품이 없어지니 신기한 일이다. ‘분명히 쿠바산 시거 향이 난다!’는 말에 샌디에이고 공항에서 구입한 시거 케이스 모양의 향수. 89대1 반포 재개발 청약 당첨증처럼 보고만 있어도 흡족했다. 원래는 향수를 잘 쓰지 않는다. 머리 냄새가 나지 않는(깨끗하다) 덕이다. 오랜만에 큰맘 먹고 구입한 향수는 공항 면세점 측의 무한한 배려라 여겼다.

쿠바 프레스타쥬 파리(Cuba Prestige paris). 이 90ml의 갈색 액체가 품은 시거 향은 내게 뭔가 어른스럽고 부유한 재벌이나 사업가의 이미지를 입혀 주리라.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풀었다. 아끼는 슈트를 입고 슬쩍 뿌렸다. 낯익은 향이다. 시거라더니, 이건 분명히 재떨이 냄새다. 그것도 반지하 사는 홀아비가 재떨이 대신 콜라 페트병에 침을 뱉고 담배꽁초 반 보루를 채워 넣은 냄새다. 시거라고 했잖아. 내 마지막 여행 중 쇼핑은 이렇게 끝났다. 당장은 해외여행을 갈 계획이 없어 정말 다행이다. 

 세상에는 살 것도 많고 볼 것도 많다. 그래서 그리울 것도 많다
 세상에는 살 것도 많고 볼 것도 많다. 그래서 그리울 것도 많다

*이우석의 놀고먹기 
‘저세상’ 유머 코드와 황당한 상황극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이우석 소장은 오랜 신문사 기자 생활을 마치고 ‘이우석놀고먹기연구소’를 열었다. 신나게 연구 중이다. 인스타그램 playeatlab

글·사진 이우석  에디터 강화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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